무념무상의 적!!!/정치는 삶이다. 95

한일 협정 및 조약 목록 2003년까지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한일간 체결한 협정 및 조약 목록 4. 한·일간 체결한 협정·조약목록 협 정 · 조 약 명 서 명 일 발 효 일 대한민국과 점령하 일본간의 무역협정 1950.6.6 1950.4.1 대한민국과 점령하 일본간의 무역을 위한 재정협정 1950.6.6 1950.4.1 대한민국과 점령하 일본간의 잠정해운협정 1950.10.4 1950.10.4 대한민국과 점령하 일본간의 무역을 위한 재정협정에 의하여 설정된 청산계정 중의 제권리와 이해관계의 이양과 인수를 위한 대한민국정부, 연합군 최고사령관 및 일본 정부간의 협정 1951.11.7 1951.11.7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1965.6.22 1965.12.18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협정 1965.6.22 1965...

한일 합의각서(1991), 21세기 공동선언(1998), 경제의제(1999), 공동성명(2003), 한중일 공동선언(2003)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한일간 주요 합의문, 공동선언 및 공동성명 5. 한·일간 주요 합의문·공동선언·공동성명 가. 재일한국인 3세이하 자손의 법적지위에 관한 한·일 외무장관간 합의각서(1991.1.10, 서울) 각 서 대한민국 정부 및 일본국 정부는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된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협정”(이하 “법적지위협정”으로 칭함) 제2조 1의 규정에 의거하여, 법적지위협정 제1조의 규정에 따라 일본국에의 영주가 허가되어 있는 자(이하 “재일한국인 1세 및 2세”로 칭함)의 직계비속으로서 일본국에 있어서의 거주에 관하여, 1988년 12월 23일 제1차 공식협의 이래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듭하여 왔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1965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기본 관계 조약 및 부속협정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3. 기본관계 조약 및 부속협정문(전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 상호 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동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

한·일 회담 개요 및 주요 내용 51~65년까지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한일회담 개요 및 주요내용 1. 한·일회담 개요 및 주요 내용 회 담 기 간 주 요 의 제 비 고 예비회담 1951.10.20- 1952.2.27 재일한국인의 국적문제, 선박문제 본회담의 토의의제 채택 제1차 1952.2.15-4.25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기본관계, 어업문제, 청구권·선박문제 日本의 對韓청구권 주장 으로 회담 결렬 제2차 1953.4.15-7.23 〃 휴전성립(53.7),제네바 회담개최를이유로 일본측, 휴회(休會) 제의 제3차 1953.10.6-21 〃 평화선의합법성에 대한 토의에 집중 日本의계속적인對韓청구권주장과구보타 발언으로 회담 결렬 제4차 예비교섭 1957.5-12.31 일본의 對韓청구권, 구보타 발언 일본, 구보타 발언 취소 제4차 1957.4.1..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6-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 없는 것인지, 2차 시험을..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5-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특전사 A급 사병 석방이 되자 곧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왔다. 신체검사 날짜와 입영 날짜가 하루 간격이었다. 소위 강제징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전사였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험한 곳에 배치 받은 나에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려들었다. 폭파 주특기를 부여 받고 6주간 훈련을 마칠 때에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화생방 최우수 표창도 함께 받았다. 어쨌든 자대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란 사실이었다. 가장 멋진 일은 점프(공중..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4-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매우 ‘비학문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3학년으로 올라가자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날로 고조되었다.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효되었고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서도 가을에 접어들자 재단 퇴진 농성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계획되었다. 나는 이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으로 접어들자 대학가의 반 유신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학생회..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3-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문제아 나는 과외수업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아버지께서 국제시장 안의,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교복맞춤집에서 교복을 맞춰 주시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된 독서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서 같은 사회 비평적 잡지와 야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사회와 인생을 알게 되었고 기초적인 사회의식도 갖추게 되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훗날 대학 입시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2-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자전거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감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 가르친 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독립심이었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긴 인생을 통 털어 볼 때 참으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가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갖지 못한 물건들과 하지 못한 많은 일들, 그러한 결핍이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는가.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란 자각..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어린시절 나는 우리 부모님이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인 1952년,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온통 눈 덮인 순백의 고향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거제도는 푸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땅이었고, 어머니는 그 풍경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했다.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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