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 없는 것인지,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던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10.26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시해되었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는 소위 ‘서울의 봄’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2차 시험을 보긴 했지만 준비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경험이나 쌓자는 심정으로 치른 시험이었다. 따라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시위와 구속을 거쳐 유치장에 갇혀 있을 무렵에는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뜻밖의 낭보를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학교 관계자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면회를 왔을 때, 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경찰서장은 그 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 축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조촐한 소주 파티까지 벌였다.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석방되었다.
3차 면접을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지금도 예전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었다. 일종의 사상 검증인 셈이었다.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지만 결코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최종 발표가 있을 때까지,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다행이도 결과는 최종합격이었다.
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검사가 되어 남을 처벌하는 일이 내 성격에는 맞지 않게 느껴져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 때문에 임용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리고 그 길목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온갖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운명적 수순처럼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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