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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4-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탄핵 대리인 트래킹 여행 중 카트만두에 도착해 쉬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신문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읽으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South korea President Roh impeached’ 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취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부터 탄핵 운운하던 한나라당이었기 때문에 이번도 정치공세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말로만 하던 것과는 달리 탄핵소추안을 발의까지 했다면 정국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탄핵 결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 되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대리인단 구성을 비..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3-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히말라야로 떠나다 2004년 2월 12일, 나는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총선에 나가야 한다는 ‘징발론’이 당에서 제기되었다. 이해 할 수 있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원칙주의를 불편해 했던 당의 인사들이 차제에 나를 청와대대에서 내보내려는 의도도 일부 깔려 있었다. 출마에 뜻이 없었던 나는 아예 민정수석 직을 그만두기로 했다.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사의를 표명하고 2004년 2월 12일에 정식으로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청와대 들어온 지 1년 만의 해방이었다. 대통령과 안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꿈같은 자유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안나푸르나가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2-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참여정부 민정수석 참여정부 시절 나는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냈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들이었으나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처음 민정수석 직을 맡아 달라 얘기했을 때 나는 그런 제안을 하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내가 그 소임을 맡게 되면 그가 하려는 개혁을 도울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능력이나 역할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멋대로 세계사 연표

지멋대로 세계사 연표 개인적으로 정리해 가는 세계사 연표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댓글 확인이 늦을수 있으니 양해 미리 구합니다. 2018년 10월 25일 시작해서 띠엄띠엄 작업 하던 것이라서 빠진 것들도 많을수 있네요. 좀더 크게 보시려면 ☞ 링크 〈2020/06/08〉 굉장한 자료 구해서 살짝 추가 함, 나중에 시간 내서 찬찬히 추가 해야 겠음 philobiblic.tistory.com/8 2008년 개정된 한국 근현대사 연표 더 이상 관리를 할 수가 없어 현재의 저작권 정책(영리사용금지, 제작자 표기, 동일조건 변경허락)을 영리사용허락, 제작자 표기, 동일조건 변경허락으로 변경하고, 조만간 수정이 가능한 엑셀�� blog.philobiblic.com 〈2020/08/2..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1-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2002년 대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참으로 가열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6일, 드디어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대선행보는 남달랐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 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준비였다.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고 나는 부산, 울산 지역 경선을 책임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워낙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간 우리가 각급 노조와 맺은 끈끈한 유대와 인맥이 큰 힘이..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0-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 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9-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8-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무현'을 만나다 판사 임용이 무산 된 나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했다. 서울시립합창단원 생활을 하던 아내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주어서 고마웠다. 사시 동기 박정규 씨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다. 박정규 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정작 그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나를 대신 소개한 것이었다. 노 변호사의 첫 인상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말..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6부작〉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위키피디아 대한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슷한 이름의 대한민국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대한제국(한국 한자: 大韓帝國, 영어: Korean Empire) 또는 구한국(舊韓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ko.wikipedia.org 대한제국 나무위키 대한제국 - 나무위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에 힘을 쏟았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21] 처음엔 제국 선포 �� namu.wiki [광복절 특별기획]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고종이 도성을 버렸다고? 아관파천 아닌 아관망명 대한제국의 역사는 아직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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