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대선 28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9-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지막 며칠은 떠나는 일로 분주했다. 함께 수고해 준 수석, 비서관, 행정관, 행정요원, 여직원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들은 청와대에 있다고 하면 대단한 자리에라도 있는 양 생각했겠지만 ‘노무현의 청와대’여서 더욱 조심하고, 더 참고, 더 욕먹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던,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고작 사진 찍는 일 밖에 없었지만 언젠가 사진을 보며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2008년 2월 24일 밤, 대통령이 차관급 이상 모두를 초대해 베푼 만찬을 마치고 아내가 먼저 짐을 싸서 양산으로 내려간 바람에 더욱 을씨년스..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8-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그해 겨울 대선이 끝나고 본격적 퇴임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 두어 달 동안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식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리는 차기 정부를 위해 여러 일을 성심껏 챙겼다. 특히 방대한 기록물을 정리해 넘기는 작업이 그랬다. 우리가 한 일을 역사에 남기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당장 차기 정부에 꼭 필요한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국정의 연속성에 비효율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진심이었다. 참여정부의 인사검증 매뉴얼도 다시 보완하고 업그레이드해서 넘겼다. 이 매뉴얼이 다시 만들어진 게 2008년 2월, 그야말로 퇴임 직전이었다. 다음 정부를 위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검증 시스템이 제..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7-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란 선을 넘어서 회담이 결정된 이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 중 하나는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 북한으로 가느냐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로 가셨다. 우리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철도를 이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북한이 난색을 표했다. 개성 위쪽부터 선로가 시원찮은데 단기간에 보수가 힘들다고 했다. 남은 길은 육로였는데, 대통령이 육로로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한 주민이 보는 가운데 평양까지 차로 간다면 그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차량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이 너무 밋밋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때 실무협의팀에 있던 의전비서관실 오승록 행정관이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대통령이 걸어서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6-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남북정상회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확실한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우리도 이라크 파병을 통해 미국에 성의를 보이는 등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서 6자 회담의 틀을 마련해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해 졌으..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5-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마지막 비서실장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마지막 비서실장은 퇴임 후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워낙 힘들었다. 그럴수록 마무리가 중요했다. “그래 우짜겠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하자.”라고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원칙과 초심과 긴장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취임사에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참여정부의 성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분명히 갖자,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헛되이 보내는 만만함이 없어야 한다, 끝까지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4-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탄핵 대리인 트래킹 여행 중 카트만두에 도착해 쉬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신문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읽으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South korea President Roh impeached’ 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취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부터 탄핵 운운하던 한나라당이었기 때문에 이번도 정치공세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말로만 하던 것과는 달리 탄핵소추안을 발의까지 했다면 정국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탄핵 결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 되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대리인단 구성을 비..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3-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히말라야로 떠나다 2004년 2월 12일, 나는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총선에 나가야 한다는 ‘징발론’이 당에서 제기되었다. 이해 할 수 있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원칙주의를 불편해 했던 당의 인사들이 차제에 나를 청와대대에서 내보내려는 의도도 일부 깔려 있었다. 출마에 뜻이 없었던 나는 아예 민정수석 직을 그만두기로 했다.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사의를 표명하고 2004년 2월 12일에 정식으로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청와대 들어온 지 1년 만의 해방이었다. 대통령과 안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꿈같은 자유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안나푸르나가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2-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참여정부 민정수석 참여정부 시절 나는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냈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들이었으나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처음 민정수석 직을 맡아 달라 얘기했을 때 나는 그런 제안을 하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내가 그 소임을 맡게 되면 그가 하려는 개혁을 도울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능력이나 역할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1-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2002년 대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참으로 가열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6일, 드디어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대선행보는 남달랐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 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준비였다.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고 나는 부산, 울산 지역 경선을 책임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워낙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간 우리가 각급 노조와 맺은 끈끈한 유대와 인맥이 큰 힘이..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0-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 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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