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남북정상회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확실한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우리도 이라크 파병을 통해 미국에 성의를 보이는 등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서 6자 회담의 틀을 마련해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해 졌으니 이는 긴 과정동안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북한과 신뢰를 쌓아나간 결실이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숨어있다. 2005년 6월,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대통령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을 특사로 평양에 보내 김정일을 만나게 했다. 정 장관이 지참한 친서에는 ‘6자회담을 조기에 재개하고 그 성과를 이어받아 정상회담을 열고 싶다는 대통령의 의중과 모든 내용을 대통령을 대신한 특사와 허심탄회하게 의논해 달라’는 당부가 들어 있었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유일한 외환 결제 창구(BDA)를 동결해 버리는 조치로 9.19 공동성명을 무색하게 만들자 정상회담 준비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11월 김만복 국정원장이 취임해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밝혔고 2007년 5월에는 백종천 안보실장까지 8.15 이전에 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하면서 회담 준비는 다시 급물살을 탔다. 비서실장인 나, 국정원장, 안보실장이 이를 추진하고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만났다. 우리는 이를 ‘안골 모임’이라 불렀다.
그해 7월 말쯤에 북측에서 모종의 연락이 올 것 같다고 해서 중순부터 기대를 갖고 기다렸다. 하지만 7월 1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샘물교회 목사, 신도들이 텔레반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해 백종천 실장은 현장으로, 나는 인질사건의 해결을 관장하기 위해 동분서주 할 수밖에 없었다.
7월 말에 북한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을 때, 인질사건만 없었더라면 내가 특사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고, 김만복 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정상회담 추진 합의를 하고 돌아왔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실무적 준비에 들어가 드디어 8월 28일로 정상회담 일정이 도출되었다.
대단히 촉박한 일정이었다. 일단 국민들께 그 사실을 알리고 청와대의 거의 모든 인력이 달라붙어 실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해가 발목을 잡았다. 북측이 이를 이유로 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대신 더욱 알차게 준비할 시간을 번 셈이라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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