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30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0-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 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9-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8-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노무현'을 만나다 판사 임용이 무산 된 나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했다. 서울시립합창단원 생활을 하던 아내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주어서 고마웠다. 사시 동기 박정규 씨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다. 박정규 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정작 그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나를 대신 소개한 것이었다. 노 변호사의 첫 인상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말..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7-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연애, 그리고 결혼 아내와 나는 대학 시절 법대 축제 때 파트너로서 처음 만났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한동안은 고작 눈인사나 나누는 숙맥들이었다. 그러다 75년 4월 시위에서 내가 최루 가스에 실신해버렸을 때 아내가 간호를 해 주었던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첫 번째 구속이 되었을 때, 걱정이 돼서 면회를 왔다는 아내는 면회시간 내내 신문을 접어 안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기사였다. 감옥에 갇힌 내가 기뻐할 만 한 일을 궁리하다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단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처지에 그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6-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 없는 것인지, 2차 시험을..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5-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특전사 A급 사병 석방이 되자 곧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왔다. 신체검사 날짜와 입영 날짜가 하루 간격이었다. 소위 강제징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전사였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험한 곳에 배치 받은 나에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려들었다. 폭파 주특기를 부여 받고 6주간 훈련을 마칠 때에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화생방 최우수 표창도 함께 받았다. 어쨌든 자대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란 사실이었다. 가장 멋진 일은 점프(공중..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4-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매우 ‘비학문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3학년으로 올라가자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날로 고조되었다.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효되었고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서도 가을에 접어들자 재단 퇴진 농성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계획되었다. 나는 이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으로 접어들자 대학가의 반 유신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학생회..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3-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문제아 나는 과외수업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아버지께서 국제시장 안의,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교복맞춤집에서 교복을 맞춰 주시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된 독서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서 같은 사회 비평적 잡지와 야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사회와 인생을 알게 되었고 기초적인 사회의식도 갖추게 되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훗날 대학 입시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2-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자전거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감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 가르친 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독립심이었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긴 인생을 통 털어 볼 때 참으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가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갖지 못한 물건들과 하지 못한 많은 일들, 그러한 결핍이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는가.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란 자각..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어린시절 나는 우리 부모님이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인 1952년,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온통 눈 덮인 순백의 고향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거제도는 푸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땅이었고, 어머니는 그 풍경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했다.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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