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의 적!!!/역사 읽기

조선 목민관 열전 : 한겨레21 기획연재 전7부작 - 스크랩정리

밥빌런 2020. 7. 13. 22:02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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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목민관 열전 : 기획연재 : 한겨레21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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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7부작으로 나온 기획연재 기사다.

다산 정약용을 이해하는데 좋은 기사인듯 싶다.

긁어올수는 없고(저작권 때문에) 링크들 정리하는 차원에서 작성

※ 시대가 다른 만큼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시각인듯 싶다.
현대는 군주가 다스리는 시대가 아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주권자의 기준이 어딘지를 명확히 하고 글들을 읽어야 할듯 싶다.
마치 국민을 백성으로, 지배를 받는 존재로 보는 시각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1부 베옷 입고 고향 돌아온 영의정 〈제807호〉

 

베옷 입고 고향 돌아온 영의정

임진왜란·정묘재란 때 임금의 절제 강조한 이원익… 다섯 차례 영의정 지냈으나 말년에는 돗자리 팔아 연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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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의 어원과 함의를 통해 목민이란 말에는,
인정(仁政)과 폭압이 양면의 동전처럼 공존함을 살필 수 있다.
목민관은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는 한 고을의 으뜸 장관이지만,
한편 백성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공포의 대상일 수도 있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욕심이 많고,
잔인포학하고,
무능하고 유약하고,
게으르고 용렬하며,
직무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목민관 자리에서 물리치도록 하였다.

 

2부 어진 목민관은 아전의 간꾀를 알아본다 〈808호〉

 

어진 목민관은 아전의 잔꾀를 알아본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 순직할 때까지 각 방의 수입·지출 챙기며 고을 살림살이를 훤히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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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에 달려간 진주 관아에서 정약용은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무엇을 마음에 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재원이 마지막까지 업무를 살피던 곳곳에는 관련 문서가 어지럽게 두서없이 놓여 있었다.
마침 머리맡 작은 궤짝에 종이 한 장이 있었는데,
각 방(房)의 수입·지출 내역이 일일이 조목조목 기록돼 있었다.
얼마나 자세했는지 문서를 보는 사람이 각기 보완하고
이에 따라 시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듯했다.
정재원이 마음을 다하고 죽을 때까지 세심했음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정약용은 이를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을 수 있었다.

넓은 정보력과 정확한 분석력

정재원은 검재리(檢災吏)에게 자신을 대신해 울산 각 고을의 재앙 정도와 형편을 조사해서 아뢰도록 했다.
검재리는 해마다 날씨와 바람 등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농사 수확물을 검사해
올바른 조세책을 펴기 위해 세운 자리였다.
검재리가 농사 형편이 어렵게 된 상황을 실제보다 과장해 보고하는 대목에는
그저 온화한 말로 응하던 정재원이었다.
하지만 검재리가 급기야 흉년이 심해서
국가에 낼 세금 격인 전총(田總)을 줄여서 아뢰려 하자,
정재원은 엄하게 판결해 검재리를 물리쳤다.
곁에서 보던 아들들이 물으니 웃으며 말하기를
“뭐 그리 새롭거나 신기할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비의 혜택과 농사 형편에 대한 보고를 통해
어느 동 어느 리에서 김매기를 했는지, 모심기를 했는지와
자세한 형편을 내가 훤히 파악하고 있는데,
아전이 어찌 감히 나를 속이겠는가”라고 했다.

상관된 자로서 본인보다 업무에 밝은 아랫사람을 부릴 일이 자주 생긴다.
그러나 상관은 넓은 정보력과 정확한 분석력을 갖추어야 한다.
정재원은 자칫 아전의 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도리어 아전의 보고를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아전의 잔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 아버지 정재원의 꼼꼼한 행정문서를 보고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았다.
이 부분이 행정가로서의 다산 정약용을 만든 시작인듯 싶다.
넓은 정보력과 정확한 분석력! 이는 결국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쌓아 올려야 할 역량이란 생각이다.

 

3부 백성의 마음을 살펴 큰 공사를 중단하다 〈809호〉

 

백성의 마음을 살펴 큰 공사를 중단하다

섬 생활 알고자 뱃길로 부임한 지도군수 오횡묵… 담배·바늘·엽전 들고 농민들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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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은 중국 정나라의 재상이었는데,
하루는 물가를 지나다 백성이 물을 건너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산은 기꺼이 그가 타고 가던 수레로 백성을 일일이 건네준 뒤에야 그 자리를 떠났다.
언뜻 보면 자산의 행동은 자애롭기 그지없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바쁜 길을 가다 멈추고 자신의 수레를 빌려주었으니
겸손하고 좋은 인품을 가졌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산의 일을 두고 맹자가 말하기를,
“자산은 은혜스럽기는 하지만 정치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한낱 칼도 크기에 따라 용도가 나뉜다.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필부가 하는 작은 은혜를 폈다고 하여
어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맹자는 재상이라면 백성이 물을 건너는 근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리를 만드는 것이
진정 어질다고 할 수 있다고 신랄히 비판한 것이다.
재상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몇 사람을 기쁘게 했다고 자족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재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을 책임진다는 뜻은 작은 온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 이 부분 예전부터 종종 쓰는 얘기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홍보하는 일들 중에 이런 일들 많아 보인다.

“내 평생 일찍이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보지 않았고
또 지금이 비가 내리는 철이라 사람들은 뱃길을 더욱 피하라고 한다.
하지만 섬에서 섬을 다스리라는 임금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야 한다.
우선 백성이 살아가는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저 섬사람들이 물길을 왕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과연 어떠한가를
내가 몸소 시험해보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뱃길로 가겠다 하는 본의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현장 중심 행정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플랫폼 노동자 관련 이슈에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행정관료들이 직접 플랫폼 노동을 해볼수 없다면,
정당이나 의원들이 나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백성은 당장 눈앞의 손익만을 따져 간척사업을 반대하지만
멀리 보면 농토를 만드는 일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횡묵은 더 이상 자신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았다.

☞ 효율보다는 백성이다. 이 부분 상당히 공감 가는 지점이다.

 

4부 백성이 힘겨워 쓰러지면 이미 늦은 것이다 〈812호〉

 

백성이 힘겨워 쓰러지면 이미 늦은 것이다

성호 이익의 제자, 목천현 수령 안정복… 좋은 사례 수집하고 공부해 부역의 고단함 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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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가능하겠는가”라고 자문하며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둘이 아님을 강조했다.

☞ 수기-치인, 修己治人 : 자기를 수양한 후에 남을 교화하여야 함.
유학이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임.

현대에도 통용되는 얘기인 듯 싶다.
과도한 세금과 부역의 고단함이 조선시대 백성들의 고단함이었다면,
현대는 먹고사는 일자리 일듯 싶다. 일자리에서 갑질이나 불공정함이 현대의 고단함인듯 싶다.
조금 다른 듯 싶지만 맥락은 비슷한 듯
또 세금 감면 부분은 가진 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현대에는 행정력으로 고단한 사람들을 보충 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다. 행정력은 한계가 있다.
최근 전국민 고용보험 vs. 기본소득이 얘기가 있는데 고민해볼 부분인듯 싶다.

방역전을 관리할 방역소(防役所)는 관가에 설치되지 않았다.
만일 방역소를 관가에 설치한다면 관리할 재원의 수가 방대해서
거두고 내는 때에 백성을 도리어 번거롭게 하는 폐단이 생길 수 있었다.
또한 중간에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경우, 감독하고 적발하기가 어려울 수 있었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한곳에 모두 모이면 이득을 보는 쪽은 다수보다는 일부 관리층이 되는 법이었다.

 

5부 빈민에겐 곡식 몇 알보다 먹고살 방도를 〈813호〉

 

빈민에겐 곡식 몇 알보다 먹고살 방도를

근본적 진휼책을 편 서유구… 제방을 쌓아 농업을 일으키고 관료의 수탈을 막고 고구마를 보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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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나라 환공이 곽나라의 옛터를 찾아가 노인들에게 곽나라가 망한 일을 물었다.
“곽나라는 무엇 때문에 망했는가?”
“착한 자를 옳게 여기고 악한 자를 미워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진 임금인데, 어찌하여 멸망하였단 말인가?”
“곽나라의 임금은 착한 자를 옳게 여겼으나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자를 미워했으나 버리지 못했으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곽나라 임금의 잘못은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을 결단하지 못한 데 있던 것이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임금이 인재를 등용했지만 오늘날은 국민이 선거로 인물을 정한다.
인물의 선악을 논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 선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옛 고사가 오늘날에 주는 교훈일 것이다.

서유구는 실용이 저술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여겨
25살에 편찬한 본인의 문집에 시작품을 싣지 않을 정도였다.

서유구는 임금과의 경연 자리에서
공부란 모름지기 독서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독서의 요체는 오직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캐묻고 밝혀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백성에게 한두 번 죽을 먹이거나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농업을 일으키면서 기민을 구제할 방도를 마련코자 했다.

서유구는 진휼과 농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문제라고 본 것이다.
흉년이 들면 잠시 세금을 탕감해 백성을 구제하는 대신
백성의 노역을 통해 농업을 위한 기반사업을 진행해
경제와 구휼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진정한 진휼책이라고 보았다.

 

6부 해박한 지식으로 백성을 이롭게 하다 〈814호〉

 

해박한 지식으로 백성을 이롭게 하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 한백겸… 아전을 제압해 공정한 행정을 펴고 공물제도의 폐해를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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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의 일곱 가지 주요 업무 중에는 ‘간활식’(奸猾息)이란 게 있었다.
부정하고 탐학한 아전을 척결해 백성을 괴롭히는 세력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민관의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목민관이 행정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다면
아전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해박한 지식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예학에 대한 나름의 식견을 갖는 것이 바탕이 되었다.

공자는 “군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자로가 스승에게 물었다.
“정치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서 백성보다 앞서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말씀을 더 해주십시오.”
“싫증내지 않는 것이다.”
한백겸이 학문을 하는 태도는 싫증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한백겸은 호조참의를 사직하는 글과 함께 ‘공물변통론’이라는 글을 올렸다.
공물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의견이었다.

☞ 대동법의 근간에 기여함

 

7부 부임 때 측근을 데려가지 말라 〈815호〉

 

부임 때 측근을 데려가지 말라

정약용이 신임 목민관에게 전하는 당부… 청렴한 생활로 위엄을 갖추고 백성을 처벌할 때 신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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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벼슬은 구해도 괜찮지만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
정약용이 <목민심서> 처음에 적은 글이다.
벼슬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과 서울에서 사무만 보는 경관(京官)은
영향력에서 큰 차이를 가졌다.
경관은 맡은 바 업무에 국한해서 일처리만 잘하면 되고
혹시 잘못되더라도 해당 업무에 한정될 뿐이다.
그러나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만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왕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한 가지 재주나 품성이 좋은 것으로 수령직을 잘해낼 수 없다.
덕이 있어도 위엄이 없으면 제대로 할 수 없고,
일을 처리하고 싶어도 학식이 밝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없는 자리가 목민의 벼슬이었다.
더욱이 자칫 일처리가 어긋나면
모든 피해는 백성에게 돌아가서 괴롭히고 흩어지게 하는데,
원망과 재앙이 본인은 물론 후손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정치를 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명분부터 바로잡겠다고 했다.
명분은 눈속임을 위한 미명과는 다르다.
명분을 바르게 세워야 일처리나 모든 문화가 바르게 되어 백성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성호 이익은 명분이 한번 무너지면
용맹과 힘을 모두 제멋대로 써서 나라가 하루도 존속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계했다.

☞ 확실히 현대의 시각으로는 제대로된 키워드를 뽑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과거의 관리는 부임때 측근을 대동 할 수 있지만 요즘과는 다른 듯 싶다.
어떤 의미론 지역간의 교류, 지식 이동의 측면을 생각하면
측근을 많이 대동하는게 좋을 수도 있을 듯 싶다.

ps

왠지 마지막엔 아쉬움이 더 드는듯 싶다.
책을 더 사서 읽어봐야 할듯 싶다.
특집기사라서 좀 분량도 되긴 하지만 미흡하다는 느낌이 든다.
논조에서도 현대와는 좀 맞지 않는 느낌도 들고,
과거 사례를 현대적 관점에서 좀 더 풀어서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래서 동양 고전은 모호하다고 하는 듯 싶다.
현대는 동도서기의 시대를 거쳐 서구적 사고에 점점 더 젖어 들어가는 듯 싶다.
우리 사회발전 과정에 우리 식의 과정이 좀 더 녹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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