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노력
다윈의 [종의 기원]의 초판에는 '자연선택이라는 방법에 의한 종들의 기원에 대하여, 또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서
선택된 종들의 보존'이라는 아주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진화 또는 다른 여러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 예를 들어 진화와 같은 개념들이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선 진화라는 개념은 종들의 가지치기라는 맥락 또는 종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맥락을 벗어나서 '우주나 별들의 진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별들의 발생에 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두 번째로 빈번한 다윈의 개념에 대한 오해는 다윈의 책에 붙여진 이 긴 제목의 마지막 세 단어 "Struggle for Life"의 번역상의 문제로부터 생긴다.
이 영어 단어의 개념은 모든 생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뜻도 포함되는데,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과격한 의미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 변형된 의미는 선동적인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력을 경쟁(투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번역인가 하는 점은 [종의 기원] 제 3장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윈이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경쟁이란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 하여야 된다는 말과 더불어 구체적인 예까지 동원하여,
생존경졍은 "생물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위글에서 보면 선동적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이라고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우리나라의 한국의 정치에서는 어떤가...
한국이란 생태계에서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은 무시되고 있지는 않는지...
남보다 부지런하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코코 샤넬'의 말 처럼 이건 부자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전세계 최빈국중 하나인 캄보디아이다.
여기서 내가 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너희들이 못사는 이유는 부지런하지 않아서야란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고민스럽다.(실제로는 여기 캄보디아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우싸-)
지구상에서의 인간들의 생태계로 보는 구도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는 도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야라고
그리고 내가 생존하는 이유는 내가 부지런 해서 아니면 내가 저 우수해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 세계 생태계에서의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은 각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에 기반해야 하는 것
이 것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영화말고 만화책)에서 인간들의 무지함으로 고도화된 문명들이 자연을 망치고 그리고 인간들을 망쳐서
거대한 죽음의 바다 부해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생각이 난다.
그 부해안에서의 공포의 존재들도 하나의 생태계의 일부라는 내용은
이미 그는 몇 십년전에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한 것이리라.
나의 편협한 인간관계와 괴팍한 성향은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 못해서 인듯 하다.
오늘도 나의 묘한(?) 편협하고 괴팍한 성질은 삽질을 또 한다.
......
한가지 더 추가
스위스처럼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되는 것일까? 왜 자살은 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인이 되었을까?
이런 현상을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해석을 내 놓았다.
자연도태를 통한 진화의 선택적인 과정은 우리 인류에 분명히 경쟁자로서의 기질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기질로서 이전 친족 집단 또는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의 경쟁에 적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단 몇 사람만을 경쟁에서 따돌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방송 및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인간상들을 제시 받는다.
그 인간상에서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자질과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우 비관적으로 보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망하고 자기 자신과 현재의 삶에 점점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 우리들의 충족 심리를 다른 곳에서 채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의된 현재 인류의 절망 심리가 결정적으로 팽배해진 시기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모든 가정에 TV가 보급되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비슷한 시기인 1950년대에 교외 지역에 거주하는 중산층 여성들의 술 소비량이 폭증했으며, 그들 자녀들의 절도 행위도 눈에 띄게 늘었다.
유전자의 정보들은 현대 인류의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유전자와 유전자에 담겨 있는 인류의 생물학정 기원을 거부하는 삶이 오히려 현재 인류의 문명을 병들게 한다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이상에서의 그의 견해를 보면 현재의 내가 하고 있는 행태도 여기에 관련이 있지 않을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들은 수많은 성공들에서 도전 의식보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까?란 생각이다.
또 그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대학교에서의 선생이란 직함…
이런 것에 잠시 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많은 동료 단원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의 나란 존재는 하찮은 존재였다가 이곳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 받으면서 너무 취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곳에서 생성되었던 확대 또는 강화된 자존감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면 이 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취해서 자신의 행동이 현지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상처만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란 우려도 든다.
무심코 학생들에게 목표를 좀 더 높게 가지게 하기 위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든 과목은 하지 않고 쉬운 과목만을 하려 하기에
쉬운 과목의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면 1년 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게 되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모토 기사의 예를 들었다.
이게 잘 못이었다.
무심코 했던 이 말이 정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고생해서 벌은 돈으로 학생들의 학비를 대고 있는 아버지들이
모토 기사들이었으니…
공부 열심히 해라
대부분의 너네들은 모토에 문제가 있으면 수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가능한가란 질문이란 측면에서는 쓰지만 바른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들의 가족, 가장, 그들을 은연중 무시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 이런 실수를 하면 보내는 이곳의 생활… 미래의 내 삶에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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