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27-29
그가 떠난 자리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번뇌와 시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안식과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안장식을 준비했다. 불교계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49재를 지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묘역 조성은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이 기꺼이 맡아주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서서 ‘아주 작은 비석위원회’를 구성했다. 유홍준 교수, 역사학자 안병욱, 건축가 승효상, 미술가 임옥상과 안규철, 조경 정영선, 그리고 황지우 시인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이었다. 그 분들 덕분에 오늘의 묘역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었다.
대통령이 유언에서 밝힌 ‘아주 작은 비석 하나의 정신’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는 이의 겸양일 뿐이므로 아주 작은 비석은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유골을 안장해 묘소를 만들되 봉분 대신 고인돌 같은 너럭바위 하나를 올려놓고 비석은 따로 세우지 않고 너럭바위에 비명을 새겨 그것이 비석이 되도록 했다. 유 청장의 아이디어였다. 황지우 시인은 묘역 바닥에 갈 박석에 추모글귀를 받으면 그보다 더 좋은 비문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안장식은 2009년 7월 10일에 엄수되었다. 유골은 백자 도자기와 연꽃 석함에 넣어져 안장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와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영상 DVD를 넣어드렸다. 역사가 참여정부를 평가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 토대가 될 다큐와,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증거 하는 추모영상을 하늘에서나마 보시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안장식을 치른 뒤 1주기까지 약 10개월 동안은 묘역조성에 전력을 다했다. 1만 8천 명의 시민들이 저마다 추모의 글귀를 새간 박석을 묘역 주변에 깔았다. 건축가 승효상 씨의 구상이었다. 박석 배치는 미술가 임옥상 씨가 설계했다.
박석 모집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희망자가 몰려 마감이 되자 미처 신청 못한 분들의 원성이 자자해 설계를 바꾸면서까지 박석 수를 늘렸다. 시민들이 새긴 추모문구는 한 줄 한 줄이 감동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비문을 얻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와 함께 박석 하나를 신청해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새겼다. 나는 그분이 대통령 재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게 한스러워 그야말로 안식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없었다.
장례를 모두 마친 후 지속적인 추모기념사업을 위해 봉하엔 봉하재단을, 전국적으로는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각각 감사직과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단들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 할까. 가끔 꿈에서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내 인생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다.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와의 만남부터 오랜 동행, 이별은 내가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물며 나는 더욱 그렇다. 기꺼이 끌어안고 남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